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아래 있어온 버마는 1885년 인도의 주(州)로 인식되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다. 당시 버마는 영국의 직할령이 아니었기에 인도인 지주 및 관리와 기독교로 개종한 일부 소수민족들이 지배층이 되어 버마 농민을 다스리는 사회 체제였다.
영국은 이런 교묘한 사회체제로 약 70년간 버마를 식민지로 두게 된다. 그러나 버마 독립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1930년대에 타킨당(黨)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에게 막대한 군수물자를 보급원조 하고 있었고 이는 버마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버마를 통해 이루어지는 군수물자 루트 - Burma Road - 를 차단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마침 드세어진 버마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는 타킨당의 발호를 좋은 기회로 여겨 "남기관"이라는 정보기관을 통해 타킨당을 지원한다. 타킨당 역시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겼고 1940년에 타킨당은 우수한 당원 30명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한다.(이 사람들이 "30인의 지사"이다. 이 중에는 버마 독립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과 버마 군사독재정권의 시발점인 네 윈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이에 맞추어 태국의 방콕에서는 30인의 지사를 중심으로 버마독립의용군이 결성된다. 일본의 강력한 입김으로 30인의 지사를 교육시킨 스즈키 게이오 대령을 사령관으로 한 버마독립의용군은 일본군의 세를 업고 버마로 진격하였고 3개월만에 영국군을 버마에서 몰아낸다.
하지만 버마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일본은 장개석을 지원하는 영국 / 미국의 보급선인 버마로드 차단에 성공하자 본색을 드러내어 친일 버마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 심한 식민 통치를 실시한다. 타킨당은 일본이 버마의 독립 약속을 지키지 않자 연합국인 영국에 도움을 청하고, 버마독립의용군은 영국군과 합세하여 버마로 진격. 1945년 3월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낸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세력이 커진 10만의 버마독립의용군은 영국과의 교섭을 시작하게 되고, 아웅 산 장군은 영국 수상 애플리와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아웅 산 - 애틀리 협정이 발효 되었지만, 정치인 우 소가 협정의 서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여 아웅 산에 대항하게 되었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 장군과 독립운동가 8명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날을 기념하여 버마에서는 "순교자의 날"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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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Aung San 장군
버마 독립의 아버지이며, 버마 국민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버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에 수많은 혼란을 겪었듯 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웅 산 장군과 8인의 독립운동가 암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수사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추후 친영 및 친일 행위 인사들에 대한 처분에까지 번져서 이들 과거사 정리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없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국과 일본 식민지의 사고방식과 유산을 그대로 답습한 버마 군이 존속하게 되고, 이것이 이후에 버마 군사 정부의 독재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한 버마족 중심의 정부가 세워지게 되자 소수민족들은 반발하여 자신들의 독립과 민족자결권을 요구하였고, 버마족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주류파인 친서방적 노선이 대립되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946. 7 붉은 깃발 공산당의 반란, 1948년 하얀 깃발 공산당의 반란, 1949년 카렌족의 반란..) 내전은 확대되었고 버마의 신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지만 곧 미국과 영국의 원조로 정상을 되찾는 듯 싶었다. 또한 30인의 지사 중 한 사람인 네 윈 장군이 이끄는 버마 정부군이 이들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산계 반란군은 이라와디 삼각주와 페구산맥으로, 카렌족은 삼각주와 태국 국경쪽으로 패퇴시켰다.
우 누가 이끄는 버마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잘 넘기는 듯 하였으나, 잦은 게릴라전과 정부정책의 미흡함으로 인해 다시금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59년에는 버마 공산반군과 카렌족 좌익이 제휴하면서 내전에 다시 불이 붙었고 기타 소수민족들도 민족 자결의 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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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Ne Win 장군
버마 독립에 즈음하여 아웅 산 장군과의 사이는 틀어지고 만다



이에 1962년 3월 2일. 네 윈 장군은 "버마의 매우 험악한 상태에 빠진 국가 정세 수습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에 성공한 네 윈은 버마의 모든 외국 자본을 국유화시켰고 자유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을 모두 거부하는 버마식 민족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중립외교를 펼쳤다.(1당 독재체제였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버마는 성장이 예견되는 국가였다. 싱가포르는 국가 목표를 버마로 잡았고, 우리 나라는 버마의 식량지원까지 받았을 정도니까.)
당시 혼란에 빠졌던 버마 국민들은 네 윈 장군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이러한 네 윈의 정책은 성공적인 국가재건모델이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1974년 버마 군사정부는 민정 이양을 표방하는 듯 했으나 실제로 군부의 지배는 여전했다. 국회는 단일후보인 네 윈을 대통령 겸 국가평의회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정보기관을 강화시켜 독재정치를 연이어 나갔다. 1981년 네 윈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 산유 국가평의회 서기장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1988년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되자 군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모든 정치지구를 폐지하고 국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설치하여 버마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1989년 군부는 영국의 식민지배의 명칭을 벗는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미얀마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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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장군의 딸인 아웅 산 수치 Aung San Suu Kyi 여사
네 윈의 1당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다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후,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면서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1990년 서방의 압력이 계속되자 미얀마 군부는 어쩔 수 없이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는 총선에서 82%의 지지를 얻어 승리하지만, 군부는 이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NLD 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가택연금을 통해 탄압하였다.
1997년 군부는 SLORC를 해체하고 3권을 장악하는

국가평화개발평의회(SPDC)를 출범시킨다.
(사실 SLORC가 이름만 바뀐 것일뿐 별다른 점은 없다.)

SPDC는 의장, 부의장, 서기와 위원들(12개 지역사령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행정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다.(SPDC는 대법원장 / 대법원 판사 / 검찰청장 / 검찰차장의 임명권까지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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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DC 의장인 탄 슈웨 Tan Shwe 장군
(버마 간부학교 9기)
원래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나 군에 입대하면서 승승장구한 케이스
집권 초기에는 온건파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강경파가 되어갔다
점성술을 신봉하여 천도를 감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지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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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DC 부의장인 마웅 에이 Maung Aye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1기)
탄 슈웨 의장처럼 강경파이며,
1990년 아웅 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사건을 주도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다
예전에 골든트라이앵글(메콩강 근처) 지역사령관 재임 시에 인연이 되어
마약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대외 무역 책임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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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의 총리인 소 윈 Soe Win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12기)
1988년 버마 민주화 운동 진압을 주도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지만 민주화 운동 진압 때 야당 인사 살해를 명령했을 정도로 냉혈한이다.
현재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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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윈 총리의 대행을 맡고 있는 SPDC 제1서기 틴 세인 Thein Sein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9기)
2003년 지방 시찰 중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NLD 간부들의 구속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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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윈 총리 이전에 총리 겸 SPDC 제 1서기였던 킨 윤 Khin Nyunt 장군
(버마 간부학교 25기)
SPDC 내 (거의 유일한) 온건파였으나 2004년 10월 축출되었고
2005년 7월 부정부패 등의 죄목으로 44년형을 선고받았다.
킨 윤 장군은 "미얀마의 민주화로 가는 7단계 로드맵"을 약속했으나,
실각하여 미얀마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제사회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 킨 윤 장군과 마웅 에이 장군은 전형적인 라이벌이다. 마웅 에이는 육사 졸업 이후 야전에서만 지내온데 비하여 킨 윤은 전투 경력은 전무하며 행정/정보장교로서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야전사령관 출신의 마웅 에이로서는 비육사 출신에 전투경험없는 킨 윤은 눈엣가시. 게다가 킨 윤은 국가정보부(NIB)와 전략연구소(OSS)를 손 안에 두고 있어서 힘이 있었다.(탄 슈웨가 킨 윤 감시를 위해 자신의 부하를 킨 윤 밑으로 보냈지만 오히려 그 부하가 킨 윤에게 충성을 맹세한 전례가 있었다..)
킨 윤의 NIB는 내전 종식을 위해 소수민족과 정전협상을 체결하였고 이에 킨 윤의 정치적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탄 슈웨와 마웅 에이로 대표되는 정부군은 소수민족 게릴라에 대한 토벌을 재차 강조하였으니.. 킨 윤이 실각하면서 NIB의 권한 및 예산은 축소되었고 이는 소수민족의 무장독립운동을 가져왔다.


※ 참고 URL
마웅저와 함께 withzaw.net
Khin Nyunt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ein Sei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oe Wi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Maung Aye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an Shwe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왕처럼 사는 군정 최고지도자 탄 슈웨 장군…딸도 결혼 때 460억원어치 선물 챙겨
철저한 통제로 ‘철권통치’ 16년째 유지
NLD(LA) 한국지부
미얀마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 - 아웅산 수치


※ 이번 버마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보다가 자료 찾은 것을 정리해보았습니다.
틀린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미얀마라는 국호는 현재의 군사정부를 지칭할 때만 표기하고 통상의 경우에는 모두 버마라는 국호로 표기했습니다. "버마"라는 신성한 나라이름이 군사정부와 같이 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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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오일게이트에 대한 간략한 설명  (4) 2007.05.08
http://agoraplaza.media.daum.net/ranking/poll.do?action=view&no=59222&writingNo=59210&kind=rankingkin

아고라 랭킹KIN에 다음의 설문조사가 올라왔다.
'자장면 시켰는데 짬뽕이 오면' 어떤 결정을 할지 고르라는 것.
답변은 두가지가 있는데, "그냥 짬뽕 먹는다"와 "다시 자장면 가져오게 시킨다".

헌데. 이걸 보노라니 요새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심형래 감독이 생각났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심혜진씨가 진행하는 토크쇼(?) 비스무레한게 있었다.
유명 인사들을 불러 들여 신변잡기적인 것부터 심각한 것까지 그 사람과 관련된 대화를 하고 여러 패널들도 나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심형래 감독이 출연했었고,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심형래 감독이 일하는 곳을 보여주었는데..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


심형래 감독이 짬뽕을 시켰다.
그런데 배달원은 자장면을 가져온 것이다.
심형래 감독은 짬뽕을 다시 가져오라고 했고, 자장면은 두고 가라고 했었던거 같다.
배달원이 나간 사이에 직원 한 명이 들어오고 심형래 감독은 직원에게 먹을꺼냐고 물어보았다.
직원은 괜찮다고 하고.. 심형래 감독은 자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이윽고 배달원이 짬뽕을 가져왔다.
심형래 감독은 자신이 먹던 자장면을 직원에게 주고, 짬뽕을 먹었다.


사람에 따라 이 상황을 보는 시각은 다르겠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로서는 그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그 프로그램을 같이 봤던 가족들과 심형래 감독의 행동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부적절한 것이었는지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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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거 해방  (8) 2007.06.24
여군주의 목걸이  (7) 2007.04.02

// 이 게시물에는 "넥스트 푸시캣 돌스"의 최종 우승자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이나 결말을 알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않는게 좋겠습니다.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진화해왔다.
기존의 퀴즈쇼는 스튜디오에서 등장인물이 주어진 퀴즈를 풀고 지력을 겨뤄 우승을 하는데 비해,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는 기존의 우승을 가린다는 주제 외에는 거의 모든 제약을 풀고 시청자와 등장인물의 간격을 없앴다.
오지에서 생활하며 퀘스트를 해결하는 진짜 생존 게임부터(서바이버), 전투를 벌이고, 갖가기 미션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자신들 속의 첩자를 가려내야 하며(스파이 더 몰), 또는 미친듯이 세계를 여행하며 미션을 수행하기도 한다.(어메이징 레이스)
또한 시청자는 소설 1984의 대형(大兄, big brother)이 되어 테두리 안에 있는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기도 한다.(빅 브라더, 템테이션 아일랜드)
그 밖에도 우승자를 가려내기 위해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다음 단계 통과자와 탈락자를 가려내어 그 분야의 신성(新星)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헬's 키친, 프로젝트 런어웨이, 도전 슈퍼모델)

그 중에서도 음악적 재능과 가능성이 뛰어난 인물을 선정하여 인기를 끌고 있는 그룹의 새로운 멤버로 영입하는 스토리를 가진 리얼리티 쇼가 있는데, 바로 얼마 전에 우리 나라에서 방송이 끝난 넥스트 푸시캣 돌스(Search for the Next Doll)이다.
이 프로그램 역시 리얼리티 서바이버 프로그램 분야에서 다량의 히트작을 보유한 CWTV가 제작을 했다.

우선 이 프로그램을 우리 나라의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없어 하는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온스타일에서 했기에 망정이지 공중파에서 했다면 주요 사람들(?)의 상당한 먹이감이 되었을 것이다. 음악적 재능과 댄서로서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시하지 못할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등장인물들의 몸매와 이미지다. 매번 거의 란제리 룩으로 등장하는 푸시캣 돌스의 멤버가 되기 위해 섹시함으로 승부하는 것이란.. 우리 나라 상황에서 볼 때 그 사람들이 들고 일어날게 뻔하다.. 뭐 그건 그렇고.. 사회자이긴 한데 별 비중도 없고, 멘트는 뭔가 좀 어색하고, 소개할 때마다 쌍권총을 날리고.. 슈가 레이의 멤버였던 마크 맥그래스가 사회를 맡는데.. 들러리 수준이다. 게다가 중간에 출연자들이 배탈이 나게 되는데, 토하는 것까지 여과없이 다 보여준다. 젠장.. 암튼 이런 익숙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일단 이 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좋다..
10대 후반 ~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핫팬츠에 탱크탑을 입고 그들의 생활을 보여주기도 하고 섹시한 몸매와 예쁜 얼굴로 TV 화면을 채운다. 이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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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18명의 후보를 뽑고 다음 에피소드에서 절반을 추려낸 뒤에, 그 이후에는 한 주에 1명씩 떨어뜨린다. 위의 9명이 1차 통과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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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지아. 푸시캣 돌스의 새 멤버가 된 우승자. 2살난 딸의 엄마이기도 하다. 노래 실력도 대단하고 춤도 잘 추고.. 처음에 봤을 때 이 아이 끝까지 가겠구나 생각했었는데 딱 들어막은 인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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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 R. 에이지아와 쌍벽을 이룬다. 적당히 귀엽고 섹시하고 노래와 춤도 뛰어나다. 다만 단점이라면.. 무대에 올라가면 소심해지는 것. 아무튼 내가 처음부터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보면서 주시하게 된 인물 중 한 명. 여담이지만, 같은 파트에 멜리사 R과 비슷한 이미지의 P모양이 계심ㅋㅋ 볼 때마다 닮은 것 같다는 느낌에 자꾸 쳐다보게 된다;;;;(근데 이거 나만 그렇게 느끼는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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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어렸을 떄 사진보면 상당히 통통한 인물인데, 마음을 굳게 먹은 뒤에 이렇게 바뀌었단다. 프로그램 중간에 메이크오버 한 번 거치면서 이후에는 미모가 확 살아나는 느낌. 가창력은 거의 최고다. 다만.. 몸이 잘 안 따라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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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사 S. 나름 이쁘다. 섹시함보다는 귀여운게 어울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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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스타샤. 재능은 뛰어나지만 신체적 조건 때문에 탈락했다고 봐도 좋을 듯.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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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엘라. 나름 괜찮았으나 가창력부족. 게다가 내가 멜리사 R, 멜리사 S, 첼시에만 관심집중-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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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슬리. 노래 잘 부른다. 근데 왕싸가지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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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 처음에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지켜봤는데 넘 빨리 떨어졌다. 아쉬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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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터니. 미안.. 역시 내가 멜리사 R, 멜리사 S, 첼시에만 관심집중-_-;;;하느라.. 푸시캣 돌스가 추구하는 섹시와는 다른 섹시함 때문에 탈락.>

에이지아가 새로운 푸시캣 돌스의 멤버가 되긴 했지만 안 좋은 루머가 돌고 있는 상황. 자세한 정황은 모르겠고.. 멜리사 S, 멜리사 R, 첼시는 시즌2의 오디션에 다시 응했다고 한다.

좀 더 자세한 것을 원한다면 http://en.wikipedia.org/wiki/Pussycat_Dolls_Present:_The_Search_for_the_Next_Doll

며칠 전에 오그릴라 평판 퀘를 시작했었다.
몇몇 정예 몹을 죽이면 오그릴라에서의 평판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데,
그 전에 오우거를 해방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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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 시켰는데 짬뽕이 오면 ㅎㅎ  (6) 2007.08.11
여군주의 목걸이  (7) 2007.04.02

2004년 1월 5일
철도청의 사업다각화 전담기구인 한국철도교통진행재단 설립


2004년 8월
철도공사가 경영개선을 위한 사업다각화를 이유로 사할린 유전개발에 참여시도(KTX 도입으로 인한 적자 구조 타개)


2004년 8월 17일
철도공사, 하이앤드 그룹, 쿡 에너지와 공동으로 한국쿠르드오일(KCO) 설립


2004년 9월 3일
유전개발권자인 페트로사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알파에코그룹의 자회사 니미르페트로 주식 97.16%룰 6200만 달러에 매입키로 계약(계약금 620만 달러, 당시 약 60억원)


2004년 10월 4일
러시아에 계약금 송금


2004년 10월 15일
ING뱅크를 통해 잔금 준비 중이라는 확약서를 러시아에 통보


2004년 11월
철도공사가 우리은행측에 신청한 대출이 거부당함


2004년 11월 15일
러시아 정부에서 사할린 유전개발에 대한 허가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페트로사하에 계약파기 통보, 니미르페트로는 러시아 중앙정부의 조건부 승인을 얻어냈다며 계약금 반환 거부.


2004년 11월 중순
감사원이 철도공사의 사할린 유전회사 인수사업에 대한 감사 돌입(철도청 모 간부의 감사원 투서)


2005년 2월
감사원의 본격적인 감사(감사원의 감사착수 사유는 "첩보확인", 청와대는 "투서는 없다"고 주장, 당시 한나라당은 이광재 의원 연루 의혹 등 정치권이 관여된 정황을 포착하고 자체 조사를 중단했다고 주장)


2005년 4월 러시아 알파에코그룹측과 계약금 반환 타결(계약금의 1/2인 310만 달러만 돌려받음)


2005년 8월 18일 특별검사팀 수사 시작


그 때 한나라당과 주요 신문에서는 세금 날려먹었다고 엄청 구박했고 특검까지 갔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석유개발기술에 일가견이 있다는 회사도 뛰어들었다가 오히려 돈만 날릴 판에 석유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게다가 한국석유공사도 거부한 민간사업에 철도청이 나섰으니 오죽했겠는가.(주변 정황 또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았다. 유전에 대한 실사 보고서는 애초에 있었는데 잃어버렸는지 아예 없었는지 알 수도 없고 커미션에 대한 추측도 난무했고 우리은행의 대출문제, 국정상황실의 조사의 상부 미보고 등등..)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국가 운영의 기반이 되는 유전개발 사업을 소홀히 진행했다는 점이다.
유전 개발 사업은 다른 사업 분야처럼 기술자 투입하면 황금젖소가 되어서 쏟아지는 성질의 사업이 아니다. 가능성을 보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것인데.. 다른 나라들도 수천만 달러를 공중분해할 각오를 하고서 개발에 열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민간기업도 그냥 포기, 석유공사도 그냥 포기.
그나마 철도청이 괜찮은 사업이다라고 판단했지만 확실하지 못한 일처리로 포기..
또한 중요한 사업이 한낱 정쟁의 도구가 되어 사업 자체의 본질은 사라지고
누구 탓인지 서로 공방하는 상황만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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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지금에 이르기까지.  (5) 200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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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드러너 첨탑에서 사냥을 하니 스컬지 한 녀석이 목걸이 하나를 준다. 이걸 고위집행관한테 가져가면 언데드의 여군주인 실바나스 윈드러너에게 갖다드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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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왕자 아서스는 자신을 방해한 실바나스를 언데드로 만들어버렸지만, 실바나스는 리치킹의 정신적 지배에 풀려나 자신의 의지를 갖게 되어 독자적인 언데드 세력인 포세이큰의 여군주가 되었다.

목걸이를 갖다주면 저렇게 쌀쌀맞게 굴지만..
아서스가 실버문을 파괴했을 때의 슬픔이 담긴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고귀한 자들의 애가(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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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W 시작 화면에서 제작진 크레딧에서 들을 수도 있다.
별 것 아닌 퀘스트 같지만 호드 내 종족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의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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