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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1 버마.. 지금에 이르기까지. 5

주변 강대국들의 영향아래 있어온 버마는 1885년 인도의 주(州)로 인식되어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된다. 당시 버마는 영국의 직할령이 아니었기에 인도인 지주 및 관리와 기독교로 개종한 일부 소수민족들이 지배층이 되어 버마 농민을 다스리는 사회 체제였다.
영국은 이런 교묘한 사회체제로 약 70년간 버마를 식민지로 두게 된다. 그러나 버마 독립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1930년대에 타킨당(黨)을 중심으로 민족해방투쟁은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에게 막대한 군수물자를 보급원조 하고 있었고 이는 버마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버마를 통해 이루어지는 군수물자 루트 - Burma Road - 를 차단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마침 드세어진 버마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는 타킨당의 발호를 좋은 기회로 여겨 "남기관"이라는 정보기관을 통해 타킨당을 지원한다. 타킨당 역시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겼고 1940년에 타킨당은 우수한 당원 30명을 뽑아 일본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한다.(이 사람들이 "30인의 지사"이다. 이 중에는 버마 독립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과 버마 군사독재정권의 시발점인 네 윈 장군도 포함되어 있다.)
1941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이에 맞추어 태국의 방콕에서는 30인의 지사를 중심으로 버마독립의용군이 결성된다. 일본의 강력한 입김으로 30인의 지사를 교육시킨 스즈키 게이오 대령을 사령관으로 한 버마독립의용군은 일본군의 세를 업고 버마로 진격하였고 3개월만에 영국군을 버마에서 몰아낸다.
하지만 버마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일본은 장개석을 지원하는 영국 / 미국의 보급선인 버마로드 차단에 성공하자 본색을 드러내어 친일 버마인사로 하여금 군정을 실시하고 영국보다 심한 식민 통치를 실시한다. 타킨당은 일본이 버마의 독립 약속을 지키지 않자 연합국인 영국에 도움을 청하고, 버마독립의용군은 영국군과 합세하여 버마로 진격. 1945년 3월 일본군을 버마에서 몰아낸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세력이 커진 10만의 버마독립의용군은 영국과의 교섭을 시작하게 되고, 아웅 산 장군은 영국 수상 애플리와 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아웅 산 - 애틀리 협정이 발효 되었지만, 정치인 우 소가 협정의 서명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여 아웅 산에 대항하게 되었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 장군과 독립운동가 8명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날을 기념하여 버마에서는 "순교자의 날"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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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Aung San 장군
버마 독립의 아버지이며, 버마 국민들 사이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버마는 1948년 1월 4일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에 수많은 혼란을 겪었듯 버마도 마찬가지였다.
아웅 산 장군과 8인의 독립운동가 암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정하지 못하고 불완전한 수사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추후 친영 및 친일 행위 인사들에 대한 처분에까지 번져서 이들 과거사 정리에 확실한 선을 그을 수 없게 만든다. 이로 인해 영국과 일본 식민지의 사고방식과 유산을 그대로 답습한 버마 군이 존속하게 되고, 이것이 이후에 버마 군사 정부의 독재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한 버마족 중심의 정부가 세워지게 되자 소수민족들은 반발하여 자신들의 독립과 민족자결권을 요구하였고, 버마족 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과 주류파인 친서방적 노선이 대립되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1946. 7 붉은 깃발 공산당의 반란, 1948년 하얀 깃발 공산당의 반란, 1949년 카렌족의 반란..) 내전은 확대되었고 버마의 신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지만 곧 미국과 영국의 원조로 정상을 되찾는 듯 싶었다. 또한 30인의 지사 중 한 사람인 네 윈 장군이 이끄는 버마 정부군이 이들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산계 반란군은 이라와디 삼각주와 페구산맥으로, 카렌족은 삼각주와 태국 국경쪽으로 패퇴시켰다.
우 누가 이끄는 버마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잘 넘기는 듯 하였으나, 잦은 게릴라전과 정부정책의 미흡함으로 인해 다시금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1959년에는 버마 공산반군과 카렌족 좌익이 제휴하면서 내전에 다시 불이 붙었고 기타 소수민족들도 민족 자결의 소리를 다시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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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Ne Win 장군
버마 독립에 즈음하여 아웅 산 장군과의 사이는 틀어지고 만다



이에 1962년 3월 2일. 네 윈 장군은 "버마의 매우 험악한 상태에 빠진 국가 정세 수습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에 성공한 네 윈은 버마의 모든 외국 자본을 국유화시켰고 자유주의 노선과 사회주의 노선을 모두 거부하는 버마식 민족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중립외교를 펼쳤다.(1당 독재체제였으나, 이 때까지만 해도 버마는 성장이 예견되는 국가였다. 싱가포르는 국가 목표를 버마로 잡았고, 우리 나라는 버마의 식량지원까지 받았을 정도니까.)
당시 혼란에 빠졌던 버마 국민들은 네 윈 장군의 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이러한 네 윈의 정책은 성공적인 국가재건모델이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1974년 버마 군사정부는 민정 이양을 표방하는 듯 했으나 실제로 군부의 지배는 여전했다. 국회는 단일후보인 네 윈을 대통령 겸 국가평의회 회장으로 선출하였고 그는 정보기관을 강화시켜 독재정치를 연이어 나갔다. 1981년 네 윈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 산유 국가평의회 서기장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러나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1988년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되자 군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모든 정치지구를 폐지하고 국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를 설치하여 버마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1989년 군부는 영국의 식민지배의 명칭을 벗는다는 명분으로 국호를 미얀마로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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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장군의 딸인 아웅 산 수치 Aung San Suu Kyi 여사
네 윈의 1당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다년간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후,
군사정부에 반대하는 집회에 참여하면서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1990년 서방의 압력이 계속되자 미얀마 군부는 어쩔 수 없이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아웅 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는 총선에서 82%의 지지를 얻어 승리하지만, 군부는 이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NLD 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가택연금을 통해 탄압하였다.
1997년 군부는 SLORC를 해체하고 3권을 장악하는

국가평화개발평의회(SPDC)를 출범시킨다.
(사실 SLORC가 이름만 바뀐 것일뿐 별다른 점은 없다.)

SPDC는 의장, 부의장, 서기와 위원들(12개 지역사령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행정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다.(SPDC는 대법원장 / 대법원 판사 / 검찰청장 / 검찰차장의 임명권까지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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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DC 의장인 탄 슈웨 Tan Shwe 장군
(버마 간부학교 9기)
원래는 우체국 직원이었으나 군에 입대하면서 승승장구한 케이스
집권 초기에는 온건파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강경파가 되어갔다
점성술을 신봉하여 천도를 감행한 일화는 유명하다
현재 지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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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DC 부의장인 마웅 에이 Maung Aye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1기)
탄 슈웨 의장처럼 강경파이며,
1990년 아웅 산 수치 여사 가택연금 사건을 주도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다
예전에 골든트라이앵글(메콩강 근처) 지역사령관 재임 시에 인연이 되어
마약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으며,
현재 미얀마의 대외 무역 책임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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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부의 총리인 소 윈 Soe Win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12기)
1988년 버마 민주화 운동 진압을 주도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지만 민주화 운동 진압 때 야당 인사 살해를 명령했을 정도로 냉혈한이다.
현재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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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윈 총리의 대행을 맡고 있는 SPDC 제1서기 틴 세인 Thein Sein 장군
(버마 육군사관학교(DSA) 9기)
2003년 지방 시찰 중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NLD 간부들의 구속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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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윈 총리 이전에 총리 겸 SPDC 제 1서기였던 킨 윤 Khin Nyunt 장군
(버마 간부학교 25기)
SPDC 내 (거의 유일한) 온건파였으나 2004년 10월 축출되었고
2005년 7월 부정부패 등의 죄목으로 44년형을 선고받았다.
킨 윤 장군은 "미얀마의 민주화로 가는 7단계 로드맵"을 약속했으나,
실각하여 미얀마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제사회에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 킨 윤 장군과 마웅 에이 장군은 전형적인 라이벌이다. 마웅 에이는 육사 졸업 이후 야전에서만 지내온데 비하여 킨 윤은 전투 경력은 전무하며 행정/정보장교로서 출세가도를 달려왔다. 야전사령관 출신의 마웅 에이로서는 비육사 출신에 전투경험없는 킨 윤은 눈엣가시. 게다가 킨 윤은 국가정보부(NIB)와 전략연구소(OSS)를 손 안에 두고 있어서 힘이 있었다.(탄 슈웨가 킨 윤 감시를 위해 자신의 부하를 킨 윤 밑으로 보냈지만 오히려 그 부하가 킨 윤에게 충성을 맹세한 전례가 있었다..)
킨 윤의 NIB는 내전 종식을 위해 소수민족과 정전협상을 체결하였고 이에 킨 윤의 정치적 명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탄 슈웨와 마웅 에이로 대표되는 정부군은 소수민족 게릴라에 대한 토벌을 재차 강조하였으니.. 킨 윤이 실각하면서 NIB의 권한 및 예산은 축소되었고 이는 소수민족의 무장독립운동을 가져왔다.


※ 참고 URL
마웅저와 함께 withzaw.net
Khin Nyunt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ein Sei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Soe Win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Maung Aye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han Shwe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왕처럼 사는 군정 최고지도자 탄 슈웨 장군…딸도 결혼 때 460억원어치 선물 챙겨
철저한 통제로 ‘철권통치’ 16년째 유지
NLD(LA) 한국지부
미얀마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 - 아웅산 수치


※ 이번 버마 민주화 운동에 대해 알아보다가 자료 찾은 것을 정리해보았습니다.
틀린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미얀마라는 국호는 현재의 군사정부를 지칭할 때만 표기하고 통상의 경우에는 모두 버마라는 국호로 표기했습니다. "버마"라는 신성한 나라이름이 군사정부와 같이 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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