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2일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치계하였다.
 
“양 경략(楊經略)이 우리 나라 군대에 헌패(憲牌:상급 장관의 명령을 말함)를 내렸는데, 황제가 하사한 은냥을 나누어주는 일로 유 도독(柳都督)과 교 유격(喬遊擊)이 경략의 분부를 받고 다음달 18일 함께 창성(昌城)으로 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월 1일
→ 애초에 명이 요구한 조선군의 병력은 1만 5천이었으나, 광해군은 1만의 병력을 내보내었다. 당시 조선군의 소총운용술 및 사격술은 명/청보다 뛰어났다.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치계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이 경략의 영전(令箭)과 발령패(發令牌)를 교 유격(喬遊擊)에게 보내어 격문을 신에게 전달하였는데, 포수 5천 명을 징발할 것을 독촉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도독이 총제(總制)의 책임을 맡고서 이런 징발령을 내었으므로 우리 나라로서는 일각이라도 지체하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래서 신이 삼영(三營)에 전령하여 우선 우영(右營) 포수 2천 명, 좌영(左營) 포수 1천 5백 명, 중영(中營) 포수 1천 5백 명을 뽑아 5천 명을 채워서 지금 들여보내려고 합니다.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로 하여금 군졸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하였고, 내지에 머무르고 있는 군대도 대열을 지어 차례로 이동하여 강변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순변사 우치적(禹致績)도 옮겨 주둔하게 하였습니다. 군향(軍餉)은 분호조(分戶曺)가 운송한 것이 1만 2천 석에 이르는데 강의 얼음이 녹으려 하는데도 배를 갖추지 못하여 군량을 운송하기가 매우 곤란하니, 조정에서 속히 지시하소서.”
 

2월 3일

도원수 강홍립에게 하유하였다.
 
“당초 도료군(渡療軍) 1만 명은 오로지 양서(兩西)의 정예병만을 선발하여 단속하고 훈련시켰으므로 장수와 졸개들이 서로 익숙하니, 지금에 와서 경솔히 바꾸기는 곤란하다.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에 힘을 쓰라. 경략이 징발하는 포수는 비록 보내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정문(呈文)으로 회답할 때에 만약 ‘우리 나라의 군사 1만 명이라고 말은 하지만 숙달된 포수는 매우 적은데 지금 그 중에서 4백 명을 차출하게 되면 동쪽 방면의 헝세가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면, 경략이 다른 진영에 배치하지 않고 우리 나라로 돌려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털끝만큼도 곤란해 하는 기색없이 들여보낼 것을 흔쾌히 허락하였으니, 경의 이 조치는 잘못 생각한 일인 듯하다. 만약 우승은(于承恩)의 왕래하는 인편을 만나게 되면 사정을 갖추어 말하여 그로 하여금 경략의 아문에 주선하게 함으로써 진영을 나누는 일이 없도록 하라.”
 

2월 7일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유 도독(劉都督)의 차인(差人)들이 창성(昌城)에 머무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가산인(嘉山人)으로 중국 이름은 유우(劉牛)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갑오년에 도독이 데려가 가정(家丁)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도독의 안전(眼前)에 있었다. 작년 윤4월 14일에 병부의 문서가 강서(江西)에 도착하였는데 도독으로 하여금 길을 떠나라는 내용이었다. 도독은 자신이 늙었음을 생각하여 집에서 부귀나 누리기를 바라고 관직에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출정이라는 통보를 받게되자 길게 한숨 쉬며 근심에 젖었다. 재촉하는 격문이 또 이르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속히 떠나기를 권하자 마지못해 길에 올라 집앞에서부터 배를 타고 곧장 통주(通州)에 이르렀다. 그 때문에 군사들과 기계를 모두 정돈하지 못하였고 오직 【사천(四川)의】 병마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또 함께 진영에 있던 자가 경성(京城)에서 내려와서 후대하는 뜻을 잔뜩 늘어 놓자 도독이 매우 기뻐하였다. 또 유길룡(劉吉龍)이라는 자는 지금 군사를 거느리고 임무를 맡고 있다. 내가 강서에 있던 때에 우연히 절강(浙江)에 가게 되었을 적에 거기에서 【본국의】 상주인(尙州人)을 만났다. 그는 7세에 귀화하여 왕씨(王氏) 성을 가진 집의 양자가 되었고, 향시(鄕試)에 합격하여 재차 북경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는데 합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문장은 매우 훌륭하여 머지않아 높은 점수로 뽑힐 것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마침 나를 보고는, 「나는 조선인인데 불행하게 타향으로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머지 않아 과거에 합격하면 행인사(行人司)가 될 것이니, 만약 본국으로 가게 되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맹세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서 끝내 고향에서 죽겠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독부(督府)가 동쪽으로 올 때에 함께 온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유길룡(劉吉龍)·유길수(劉吉壽)·유조용(劉朝用) 등이 드러나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이고, 이 밖에도 나온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하였다.
 
유해(劉海)라는 자는 진주인(晉州人)이다. 그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었는데, 번번이 도독에게 아버지를 만나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였으므로 도독이 허락하였다. 유해가 경사(京師)에 도착하자, 왕이 내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본도에 명하여 그의 아버지를 올려보내도록 명하니, 여러 읍들이 역마를 번갈이 태워 올려보냈다. 왕이 도감에게 엄히 주의를 주어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한 곳에서만 만나도록 허락하였으며, 역관배들로 하여금 함께 들어가 이야기를 듣게 하였으니, 대개 본국의 일을 누설할까 두려워해서였다. 그리고는 거처를 각자 따로 쓰게 하고 함께 자지 못하게 하니, 유해의 부자가 통곡하며 돌아갔다. 【유해는 즉 거창인(居昌人) 신인의 아들이다.】
 

2월 13일

사은사 신식과 성절사 윤휘(尹暉) 등이 칙서를 가지고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왔는데, 왕이 모화관에 나가 맞이하였다.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서를 내리노라. 담당 예부가 보고한 데에 따르면, 왕이 ‘바다에 표류한 인민 설만춘(薛萬春) 등 41명이 경내에 이르렀기에 지금 배신(陪臣) 신식 등을 파견하여 압송해 보낸다.’고 아뢰었다고 하여, 왕이 중국 조정을 높이 받들어 변함없이 충성을 다한다는 것을 알겠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긴다. 이에 특별히 칙서를 내려 장려하고, 아울러 은과 무늬 있는 비단과 채단을 하사하여 근면하고 성실한 데에 답하는 바이다. 신식 등으로 하여금 싸가지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도착하면 수령하도록 하라. 압송해 온 배신 신식 등과 서장관·통사 등의 관원인 윤지경(尹知敬)과 수행하여 바다를 건넌 관원 등도 모두 수고하였으므로 차등있게 하사품을 내렸음을 아울러 유시하는 바이다. 왕이 나의 뜻을 잘 헤아릴 것으로 알고 유시하노라. 〈 만력 46년 9월 17일〉 ”
 
하고, 또 한 칙서에 이르기를,
 
“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서를 내려 하유하노라. 짐이 하나로 통일된 나라를 다스리고 사방 오랑캐를 지키니, 먼 나라에서 보배를 바치는 때를 만나 활시위를 당기고 화살이 날아가는 전쟁의 경보가 그쳤다. 그런데 건주(建州)의 오랑캐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변방에서 복종하다가 개나 양의 무리처럼 끝없이 탐욕을 부리고 이리나 돼지처럼 갑자기 쳐들어와 우리 변방을 크게 어지럽히고 우리 백성들에게 해를 끼쳤다. 그들의 침략을 먼저 살피지 못한 것이 중국의 과실이었으니 짐이 이에 크게 노하여 성대한 무리를 정돈하여 정벌하는 위엄을 보이는 바이다. 그대 조선 국왕은 삼가 봉토를 지키고 공경히 번직(藩職)을 수행해왔으므로 저 못난 무리에게 분노하여 우리의 선봉대를 맞이하고, 태사(太師)의 격문을 받들어 배신(陪臣)의 모의를 모아 군사 1만 명 이상과 말 7백여 필을 바쳤고, 간첩을 보내어 적진을 정탐하고 염초를 사서 화기를 만들었다. 그대가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어려움을 생각하여 근왕(勤王)한 것 또한 가상한 일이다. 이에 특별히 부(部)의 복제(覆題)에 의거하여 보낸 말의 값과 염초를 지급하여 군실(軍實)을 돕고 아울러 헌묘(憲廟)의 구례에 따라 칙서를 내리는 바이다. 그대는 장수를 명하고 군사들을 통솔하여 기율을 더욱 엄하게 하고, 경략의 말에 따라 기미를 보아 군사를 징발해서 날을 정하여 진격하되, 협공하는 형세를 이루기를 힘써 하루 빨리 평정하는 성과를 거두도록 하라. 그렇게 되면 짐은 각별히 하사를 아끼지 않고서 그대의 공훈과 그대의 장사들에게 보답할 것이다. 군대를 나누어 섬에 파견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하되, 특별히 경계를 엄중히 하여 놀라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 조묘(祖廟)의 큰 무고를 이미 씻어 주어 세덕(世德)이 거듭 빛났고, 중국 조정의 보살핌이 돈독하여 나라의 기틀이 다시 가다듬어졌으니,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모든 힘을 다 바치는 마음으로 은혜를 갚는 정성을 펴도록 하라. 신중히 하라. 이와 같이 하유하노라. 〈 만력 46년 9월 17일〉 ”
 
하였다.
 

2월 18일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였다.
 
“경략의 헌패(憲牌)가 도착했는데, 모두 군기(軍機)에 관계되는 긴급한 일이었습니다. 즉시 헌패 내의 뜻으로 부원수 김경서(金景瑞) 및 삼영(三營)의 장령들을 신칙하고 중국 조정의 분부가 다시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한편, 부원수로 하여금 먼저 강을 건너 별열 앞 언덕에 주둔하게 하였고, 좌·우영은 뒤를 이어 강을 막게 하였으며, 신은 중앙에서 계책을 헤아려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변을 방비하는 데에도 총제(摠制)하는 관원이 없어서는 안되겠기에 순변사 우치적(禹治績)에게 강가로 전진하여 주둔하도록 전령하였습니다. 또 전 부사 이찬(李纘)을 영장(營將)으로 호칭하여 그로 하여금 정탐과 군량미 운송에 관계되는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 감히 아룁니다.〉 ”
 

2월 19일
도원수 강홍립이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러한 때에 망극한 남의 말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직무를 보아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이 때 홍립의 이름이 익명서에 거론되었기 때문에 〈 상소하여 사직한 것이었다.〉 】


2월 2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원수 강홍립이 등서(謄書) 한 통을 보내왔는데, 별지와 본사에 보내는 첩보와 교 유격이 원수에게 보낸 게첩이었습니다. 첩지 중에 ‘비직(卑職)은 석고 대죄하는 중이라서 감히 직접 장계를 올리지 못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석고 대죄한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신들의 억측으로는 도원수라는 글자가 며칠 전 병조에서 포착한 익명서에 나온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대의 기일이 임박하여 책응하는 일이 한창 급하므로 일각이라도 원수가 일을 폐해서는 안 될 때인데, 〈 이렇게〉 공무를 보지 않는 것은 진실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그 첩문과 별지를 아울러 입계한다는 〈 뜻을 감히 아룁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급히 의논하여 처리하고, 도원수에게 안심하고 맡은 일을 보라는 내용으로 하유하라.”
 
하였다.


2월 21일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삼영(三營)의 병마(兵馬)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창성(昌城)으로부터 강을 건너 중국 장수와 대미동(大尾洞)에서 만났는데, 그곳은 바로 중국과 접경한 곳이다. 중국 조정의 유격장 교일기(喬一琦)가 함께 행군하였는데, 그는 경략의 명을 받고 와 우리 군사를 호송하는 자였다.


2월 22일
접전할 날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원수의 군대가 주둔한 채 출발하지 않았다.


2월 24일
이보다 먼저 도원수 강홍립이 어머니의 병을 이유로 체직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십승(十乘)으로 행차하여 삼군(三軍)의 명을 맡았으니, 비록 사사로운 근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가벼이 사직해서는 안 된다. 경의 연로한 부모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내가 이미 내의(內醫)에게 약을 가지고 가서 구완하도록 조치하였다. 신명이 도와서 약을 쓰지 않아도 병이 낫는 기쁨이 있을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맡은 일을 다하는 데 더욱 힘쓰도록 하라는 〈 것으로 회유하라.〉 ”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군병이 이미 강을 건너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싸움에 쓰기에 적당한 군기(軍器)와 입에 풀칠이라도 할 만큼의 은자(銀子)를 주둔하고 있는 곳에서 나누어 주는 것이 형세로 보아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적의 경내에 깊이 들어간 후에 어사가 선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선 차관을 정하여 말·활·화살·은자를 속히 원수에게 들여보내 그로 하여금 먼저 나누어 주게 한 뒤에, 어사는 교서를 완전하게 써서 주둔하고 있는 변방으로 뒤따라가서 군대가 다시 강을 건너오기를 기다렸다가 고기와 술을 마련해 군사들을 먹이고 덕의(德意)를 선유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원수의 군대가 엄수령을 넘어 양마전(亮馬佃)에 주둔하였다.


2월 25일

원수가 군대가 그대로 양마전에 주둔하면서 치계하기를,
 
“역관 최득종(崔得宗)이 관전(寬田)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유 총병(劉總兵)과 강 포정(康布政)이 어제 관전을 출발했는데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고, 장관(將官) 유길룡(劉吉龍)도 군사를 거느리고 도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군사들의 수를 물어 보았더니 관전 부근의 주객(主客) 관병(官兵)이 2만 4천여 명이라고 했습니다. 정탐하러 갔던 자가 와서 말하기를 ‘노추가 2만 군사를 나누어 보내 우모채(牛毛寨)에 매복시키고 동쪽 방면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다. 본채(本寨)와 양마전과의 거리는 60리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대로 진을 치고 주둔하고 있으면서 도독이 오기를 기다려 진퇴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하고, 부원수 김경서가 치계하기를,
 
“신은 앵아청(鸚兒淸)으로부터 행군하였는데, 눈보라가 거세게 휘몰아쳐서 삼군(三軍)이 눈을 뜰 수 없었고, 산골짜기가 깜깜해져서 지척도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생고생 하다가 날이 저문 뒤에 진을 치고 보니 중국 장수 유삼(劉三)과 강 참장(江參將)이 각기 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도착하여 좌우로 진영을 나누어 쉬고 있었습니다. 중국 장수 유 총병(劉摠兵)과 강 안찰(康按察)도 군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 군대와 만났습니다.”
 

2월 26일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기를,
 
“대설 중에 행군하느라 각영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은데다가 도독의 전진하라는 명령도 없었으므로 신들은 주둔하여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조금 뒤에 도독이 강안찰과 함께 양마전으로 와서는 사람을 보내어 신들을 전진하도록 재촉했으므로 신들은 즉시 삼영의 병마(兵馬)에게 명하여 먼저 출발하였습니다. 양마전에서 15리 되는 전두산(轉頭山)에 닿았을 때에는 날이 이미 저문 뒤였으므로 여섯 장수와 함께 모두 진을 치고 밤을 지냈으며, 부원수는 유삼(劉三), 교 유격과 함께 전두산에서 십여 리쯤 지나서 떨어진 곳에 주둔하였습니다. 신 홍립이 가서 도독을 만나보고 각 방면 군사의 수를 물었더니, ‘서남 방면에 대병(大兵)이 일제히 전진하고 있고, 동쪽 방면의 군사는 내가 친히 거느린 장정 수천 명과 각 장수가 거느린 병사가 있을 뿐이니, 통틀어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고립될 텐데 대인(大人)은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습니까?’ 하고 신이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고, 나도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직 벼슬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전(寬田)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왜 이렇게 빨리 전진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병가(兵家)의 승산은 오직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고 인심을 따르는 데에 있을 뿐이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 천시를 얻었다고 할 수 없고, 도로가 질척거리니 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병권을 잡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는데, 무척 기분이 나쁜 기색이었습니다. 신들이 그 진영에 나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였다.【유정(劉綎)이 일찍이 사천(四川)에서 진무하던 때에는 수하에 매우 날래고 용맹한 묘병(苗兵)이 있어서 일찍이 서강(西?)을 방어할 때에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유정이 그들은 조금 필요로 하였으나 양호가 전진하도록 재촉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월 27일

원수의 삼영(三營) 군사가 전두산으로부터 압아하(鴨兒河)를 건너고 배동갈령(拜東葛嶺)을 넘어 우모령 쪽으로 40리를 행군하여 주둔하였다. 중국 조정의 장관 유 총병 이하는 동서로 진영을 벌여 대비한 채로 밤을 지냈다.
도원수 강홍립이 치계하였다.
“동쪽 방면의 장수들이 거느린 군병과 장수는 유 총병(劉摠兵), 강 부총(江副摠), 조 참정(祖參政), 요 유격(姚遊擊), 서 수비(徐守備), 유 수비(劉守備), 주 지휘(周指揮)가 관전(寬田)으로부터 출병했고, 교 유격(喬遊擊), 주 도사(周都司)가 진강(鎭江)으로부터 출병하였는데, 말로는 3만 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신이 보기로는 1만여 명을 넘지 않는 듯합니다. 도독은 뒤따라 오는 군대를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출병하게 한 데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드러내 놓고 하였으며, 교 유격도 창졸간에 군사를 일으킨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대개 동쪽 방면의 군대가 전진하는 길은 험난하고 멀며 큰 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또 강을 가로질러 건너야 했는데, 압아하(鴨兒河)에 비하여 더 깊고 넓기 때문에 비가 조금만 와도 건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압아하를 모두 네 번 건넜는데, 깊이가 말의 배에까지 차며, 물이 검고 돌이 커서 사람과 말이 건너기 어려웠습니다. 군인들은 각자 행장을 가지고 있는데 반도 채 못 와서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또 가지고 온 군량은 이미 다 떨어져가는데 군량과 건초가 아직 후송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군사들을 독촉하는 경략의 영전(令箭)의 도독에게 도착했으므로 군대를 전진하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2월 28일

원수의 군대가 우모령(牛毛嶺)을 넘고서 치계하기를,
“어제 배동갈령(拜東葛嶺)으로부터 도독이 주둔한 곳으로 뒤쫓아가서 ‘보병의 짐이 무거워 말을 탄 군사를 쫓아갈 수는 없다.’는 뜻을 고하였더니, 도독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기일이 임박했으니 다른 방면보다 늦어서는 안 된다. 오늘 내가 우모채에서 밤을 지낼 것이니 귀영(貴營)의 군대는 조용히 뒤쫓아 오도록 하라.’ 하고는 즉시 먼저 출발하였으므로 우리 군대는 뒤를 쫓아 재를 넘었습니다. 이른바 우모령은 철령(鐵嶺)보다 더 험하며 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듯한 곳인데, 적이 새로 큰 나무를 베어 시내와 골짜기에 이리저리 쓰러뜨려 사람과 말이 지나가지 못하게 해놓은 곳이 세 군데였습니다. 나무를 베면서 행군하여 해가 질 무렵에 우모채에 닿았습니다. 원래 있던 호가(胡家) 30여 가구가 이미 불탄 뒤였으므로 그들이 묻어놓았던 곡식을 도독의 군사들이 파내어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곳은 본채(本寨)로부터 1백 50리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창성에서 강을 건너던 날에 사람들이 제각기 10일치 양식을 가지고 출발하였는데, 지금 이미 거의 다 되어 양식이 떨어질 날이 눈앞에 닥쳤습니다. 신이 이러한 뜻으로 도독에게 재차 삼차 간곡하게 말하였더니, 도독은 ‘귀영의 군사들은 양식이 운송되어 올 때까지 머물러 있어라. 나도 하룻동안 더 머물렀다가 내일 귀영의 군사들과 함께 전진하겠다.’ 하였습니다 장 부총(張副摠), 요 유격(姚遊擊), 교 유격(喬遊擊), 주 도사(周都司), 서 비어(徐備禦), 주 비어(周備禦)가 거느린 군사들은 먼저 전진하였습니다. 날이 저물도록 군량이 도착하지 않았으므로 우영(右營)에는 어제 저녁에 양식이 떨어져 교 유격이 보내온 소미(小米) 10포와 마두(馬頭) 2포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화가 눈앞에 닥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박엽(朴燁)과 윤수겸(尹守謙)이 양로(糧路)를 끊어서 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었다.〉 】
 

2월 29일
군량이 도착하지 않아서 원수의 군대가 우모채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 제독은 전진하지 않고 주둔시키고자 하면서 교 일기(喬一琦)를 먼저 전진하게 하였다.【【그 당시에 관향사 윤수겸(尹守謙)은 강가를 서성대면서 운송을 독촉하는 뜻이 없었으니, 만약 군법을 적용한다면 군흥(軍興)을 부족하게 한 죄로 처벌해야 할 것인데, 마침 군대가 전멸함으로 인하여 끝내 그 죄를 말하는 자가 없었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10월 13일
→ 후금이 보낸 편지에 대한 지방관의 업무 과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조선의 후금에 대한 정책은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밑줄 부분)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북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오랑캐가 편지 겉봉에 ‘국왕은 열어 보시오.’라고 썼다 하는데, 이는 저번날 만포(滿浦)에서 보내온 편지와 그 형식이 같습니다. 이 적들이 예전에는 으레 회령(會寧)과 만포 등 고을에 편지를 보내 의견을 통지했는데, 중국을 침략할 뜻을 가진 뒤로는 우리 나라를 능멸하는 마음을 내어 이와 같은 편지를 보내 우리를 시험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랑캐의 일에 대해서는 비록 깊이 따질 것이 없습니다만, 그들의 흉악하고 교활한 정상을 훤히 알 수가 있으니, 매우 마음이 아픕니다.
 
전에 만포 첨사는 그들의 편지를 받으면 뜯어서 속의 내용을 베낀 다음 도로 돌려주었으나 오랑캐의 차인이 받지 않자 임시로 관중(館中)에 남겨두고 상사에 보고하는 시늉만 하여 기미의 방법으로 삼았는데, 이는 변방 장수가 일시적으로 변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받지 않는 것이 직절(直截)한 것인 줄만 알고 베껴 올려 보내는 것이 적절한 방법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편지 내용을 알지 못해 대응할 수 없게 하였으니, 그들이 적절히 대응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병사 이하는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이 오랑캐가 오는 것은 진실로 우리의 뜻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가 없지 않으니, 모든 접대하고 선물하는 등의 일을 일체 전례를 준수하여 조금도 차질이 없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청하는 녹봉과 초가(貂價)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약속 날짜를 정하고 호의로 접대하여 보내 주는 한편, 그 편지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을 경우 만포의 예에 의거하여 관중에 머물려두고 본문을 베껴 보내어 받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응당 지급해야 할 목면은 호조와 병조로 하여금 급히 들여보내게 하소서. 청컨대 이러한 뜻으로 행회(行會)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18일
→ 유격 교일기가 파병조선군에 대한 감독을 맡게 되었고, 이로써 조선군은 독자적인 전술책을 펴지 못하여 실력발휘의 기회를 상실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경략(經略)의 헌패(憲牌) 안에 있는 내용을 보건대, 특별히 교 유격(喬遊擊)을 차출해서 병마를 거느리고 우리 나라의 군병을 감독하겠으며, 관전(寬奠) 등 세 보(堡)의 병마와 회합하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병력에게 한 지역을 단독으로 감당하게 하려는 뜻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망하고 회피한다는 등의 말은 우리 나라가 시종 주저하고 어렵게 여기고 있는 형세를 바로 지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저들과 우리가 병력을 합하여 협동해서 진격하여 적을 섬멸하려는 날을 당해서 우리 나라가 일마다 경략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비록 사정을 통지하고 품복(稟覆)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지극히 우려됩니다.
 
궁시(弓矢)에 있어서는 상께서 특별히 들여보내 군문(軍門)의 수요를 도운 것이었으며, 7백 필의 전마(戰馬)는 이미 제본(題本)으로 청한 것이었는데 일체로 거절을 당했으니, 일의 체모가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온당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을 승문원으로 하여금 다시 한 통의 자문으로 갖추게 하고, 아울러 겸손하게 사과하는 뜻을 나타내서 그들의 의혹을 풀어주는 것이 현재의 일차적 급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궁시와 전마를 당초 계산해서 개록(開錄)했던 숫자대로 일일이 점검해 보내소서. 그런데 말들 가운데 마르고 병이 들어 용도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얘기를 신들이 또한 일찍이 들었습니다. 경략의 비하(批下) 안에도 거마(車馬)들이 대부분 견디지 못할까 염려되니 기정(騎征)을 견딜 만한 것으로 정밀하게 가려 1백 필을 보내라고 했으니, 이는 또한 그 말들이 마르고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이와 같이 미리 저지하는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쓰지 못할 말들은 다시 원수로 하여금 다른 좋은 말로 바꾸어 보내서 저들의 꾸지람을 받지 않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0월 22일
→ 후금의 지난 번 편지에 대한 답장의 내용과 문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내용의 충실성을 강조하여 만약에 발생할 명나라의 오해를 방지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지난날 함경 감사가 보내온 오랑캐의 편지에서 언급된 녹봉(祿捧)을 목면(木綿)으로 지급하도록 허락할 일에 대해서 관례에 따라 지급할 뜻으로 저번 북병사(北兵使)의 장계로 인하여 이미 복계하였습니다. 회답할 즈음에 마땅히 ‘너희 군영은 우리 나라와 함께 중국 조정을 섬겨 중국 조정이 매우 후하게 어루만져 주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사소한 혐의를 가지고 중국 조정을 배반하는가. 우리 나라의 도리로 볼 때는 진실로 배척하여 너희와 관계를 끊어야 하겠지만 대국의 도량으로 포용해 주어야 마땅하겠기에 아무 달 사이에 준비해 놓고 기다릴 것이니 너희가 가져 가라. 그리고 하늘을 거역하는 계책을 세우지 말아서 사대의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양국의 우호를 보존한다면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말을 잘 만들어 개유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북(西北)의 군대를 선유하는 교서는 평범한 윤음(綸音)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반드시 조어를 간절하고 애틋하게 한 뒤라야 충의의 마음을 바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태만한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유하는 즈음에 중국 장수가 그 내용을 전해 들을 수도 있으니, 마땅히 중국 장수들이 예전에 구제해 준 은혜와 우리 나라가 오늘날 지성으로 토벌을 돕는 의리를 갖추어 진술해서 중국 장수로 하여금 알도록 하는 것이 무방할 둣합니다. 대제학으로 하여금 지어 급히 발송하도록 하는 것이 〈 마땅하겠습니다.〉 ”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1월 16일
→ 후금의 첩보행동에 대한 대비를 지시. 그 이면에는 명의 조선 정탐 및 감시에 대한 경계도 있을 것이다.

전교하였다.
 
“이처럼 오랑캐를 정벌하는 때를 당해서 간첩들이 돌아다닐 근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오랑캐가 중국인의 복장으로 변장하고 와서 우리 나라 변경의 일을 엿보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도원수 및 서북의 감사와 병사가 있는 곳에 하유하도록 하라.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각별히 기찰해서 만약 중국인이 왕래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역관으로 하여금 온 곳을 상세히 물어서 자세히 허실을 분별하여 처치하도록 하게 하라.”
 

11월 18일
→ 우리 나라 사람이지만 명의 관리인 유해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전교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의 차관 유해(劉海)가 올라온다고 하는데, 이러한 때 중국인이 왕래하는 것은 지극히 염려스럽다. 게다가 유해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유 도독을 따라가서 원임 천총(原任千摠)이 되기까지 한 만큼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 반드시 알지 못하는 게 없을 것이니, 더욱 매우 우려할 만하다. 급히 역관과 선전관을 평양 등처에 보내서 도독이 요구하는 물품을 마땅히 급히 찾아 보내고 우선 올라오지 말게 할 일을 감사 박엽(朴燁)을 시켜 십분 주선하게 해서 기어이 그로 하여금 따르게 만들라. 만약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감사로 하여금 그가 도착한 곳에 가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이를 해조로 하여금 오늘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11월 20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본사에 첩정(牒呈)하기를 ‘도성 밖의 파발군 4명을 황연도(黃延道) 군인 중에서 떼어 내어 군관으로 하여금 데리고 가게 하고, 급료와 머물며 거처할 방 등에 관한 일은 본사가 각사를 신칙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얼거나 굶주리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의도는 대체로 애초에 파발군을 설치할 때 단지 창릉(昌陵) 앞 뜰에만 설치하였기 때문에 서울로부터 공문을 전달할 즈음에 으레 지체되는 일이 많았으므로 마군(馬軍) 4명으로 하여금 도성 밖에서 대기하게 하여 빨리 전달하는데 편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병조로 하여금 임시 집을 지어 주거나 도성문 밖의 빈 집을 지급하도록 하고, 호조로 하여금 군량과 마두(馬豆)를 상례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고, 경기 감사로 하여금 날마다 마초(馬草) 4속(束)과 시목(柴木) 2속을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2월 6일

평안 병사가 치계하였다.
 
“교 유격(喬遊擊)의 가정(家丁) 송조립(宋朝立)과 우 유격(于遊擊)의 가정 등이 적로(賊路)를 정탐하기 위하여 만포(滿浦)에까지 이르렀다가 폭설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12월 8일
→ 파병 조선군에 대한 의류 보급을 지시.

전교하였다.
 
“며칠 전 서북(西北) 지방에 들어가 대비하고 있는 군병들에게 목면을 내려 보내 나누어 주도록 계청(啓請)한 일을 어찌하여 아직까지 처리하지 않고 있는가? 비변사로 하여금 빨리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12월 13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양 경략(楊經略)이 상서(尙書)로 승진했다는 말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 나라로서는 사신을 보내어 치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물을 미리 마련해 두고, 사신도 차출하여 짐을 꾸려 대기하고 있다가 확실한 보고가 들어오면 즉시 출발하게 해야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살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12월 19일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치계하였다.
 
“교 유격(喬遊擊)이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금년 11월 26일에 두 총병(杜摠兵)과 마 총병(馬摠兵)이 금(金)·백(白) 양 추장의 병마를 대동하고 노추(奴酋)의 외책(外柵)을 공격하여 적의 수급 87급(級)을 베고 4백 14명을 생포한 다음 개원(開原)에서 방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 총병의 전첩(傳帖)이 진강(鎭江)에 도착했습니다.”
 

12월 27일
→ // 예나 지금이나 고생하는건 병사들이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도료군(渡遼軍)에게 지급하기 위하여 거두는 포를 이달 25일로 기한을 정하였는데, 가을에 흩어져 나간 도성의 백성이 꽤 많으므로 호적으로 근거를 삼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드시 현재 실제로 남아 있는 방민(坊民)의 수를 조사하여 개성부(開城府) 호구와 통합한 뒤에야 포의 필수를 참작하여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방방곡곡 분류하여 호구를 계산하자면 날짜를 지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성부의 호적이 아직 올라오지 않아 형편상 기한 내에 거두기 어렵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이 일은 내가 비록 자세하게는 모르나 이렇게 꾸물대다가는 겨울이 다 지나가 버릴 것이니, 제대로 변방의 추위를 막도록 해줄 수 있겠는가. 다시 더 재촉하여 거두어 급히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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